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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정읍 선비 안의와 손홍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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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계센터 작성일 26-04-19 18:47 조회 34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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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화마 피해 내장산으로 옮겨
선생의 숭고한 업적 기리는 흉상 제막식 열려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정읍의 선비 안의·손홍록 선생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는 영정 봉안식·흉상 제막식이 지난해 10월 26일 정읍시 칠보행복이음센터와 시립박물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 행사는 안의·손홍록 선생 영정 봉안·흉상 헌정 추진위원회(공동추진위원장 정세균 전 국무총리·이홍식 연세대 명예교수)가 주최하고, 안의·손홍록 선생 선양 모임(대표 박영일)이 주관했다.

선양 모임은 두 선생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지난 2023년 12월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영정·흉상 제작을 추진해왔다. 특히 두 선생의 영정·흉상은 문중 후손 각 40명의 사진을 인공지능(AI)으로 생성·도출한 표본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돼 의미를 더했다. 영정은 소미정 작가(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졸)가, 흉상은 김소영 조각가(홍익대 조소과 졸)가 맡아 완성했다.

경기전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순식간에 국가 존립의 위기에 빠졌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고, 수도 한양은 물론 지방의 주요 관아와 문화유산 역시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라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또한 전쟁의 화마 앞에 놓이게 되었다.

이 위기 속에서 결단에 나선 인물이 있었다. 정읍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다. 안의는 1529년(중종 24)에 전라도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였다. 젊은 시절 이항(李恒)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평생 벼슬보다 도의(道義)를 따른 인물이었다. 병조판서 안사종(安士宗)의 후손으로 문벌이 있었지만, 그는 늘 청빈하게 살며 “나라가 바로 서려면 문(文)이 서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손홍록은 그보다 여덟 살 아래인 1537년(중종 32) 전라도 정읍(井邑)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예문관부제학(藝文館副提學) 손비장(孫比長)의 종손으로 태어나 일찍부터 경학(經學)에 능통했다.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권세보다는 책을 가까이했고, 나라의 근본이 기록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출처 : 조선의 역사를 건진 두 선비-안의와 손홍록)

이들은 왜군이 전주 일대까지 진입할 가능성을 현실적인 위협으로 판단했고, 경기전에 보관 중이던 실록을 그대로 둘 경우 소실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문제는 선택이었다. 실록을 옮긴다는 것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었다. 수레에 실어 이동하는 순간, 그 존재가 드러날 수 있었고, 왜군에게 발각될 경우 실록은 물론 운반자들 역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을 지키는 것이 곧 나라의 기억을 지키는 일이라 판단했다.

이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실록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전라도 정읍의 내장산, 그 안에 자리한 내장사였다. 내장산은 깊고 험한 산세로 외부의 접근이 쉽지 않았고, 사찰은 은신과 보관에 모두 적합한 공간이었다. 승려들의 협조 아래 실록은 산속 깊은 곳에 숨겨졌고, 철저한 비밀 속에 보존되었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살렸다. 실제로 다른 사고에 보관돼 있던 실록들은 전쟁 과정에서 상당수가 소실되었지만, 내장산에 옮겨진 전주 사고본 실록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왕권 운영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이 선택 덕분이다.

기록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

안의와 손홍록의 선택은 단순한 ‘보존 조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총과 칼이 아닌, 기록을 국가의 핵심 자산으로 인식한 조선의 국가관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전쟁 중에도 조선은 무기보다 먼저 역사를 숨겼고, 왕조의 정당성과 통치의 근거를 담은 기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이 사건은 중앙의 명령이 아닌, 지방 관료와 유생의 자발적 판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 직전에 놓인 상황에서도, 개인의 역사 인식과 책임감이 국가의 기억을 지켜냈다는 점에서다. 이름 없는 다수의 협력, 승려들의 지원, 그리고 위험을 감수한 소수의 결단이 맞물려 역사는 살아남았다.

정읍 내장사로 옮겨진 경기전 실록은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게 된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장산 깊은 곳에서 지켜진 기록은, 전쟁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권력보다 오래 기억되었다.

당시 실록을 지켜낸 장소는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또한, 이때의 일을 기록한 ‘임계기사(壬癸記事)’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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