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어떻게 풍패지향이 되었나? > 해동육룡이나르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해동육룡이나르샤

전주는 어떻게 풍패지향이 되었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성계센터
댓글 0건 조회 650회 작성일 25-05-23 10:35

본문

1.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본향은 전주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주를 조선왕조의 발상지, 조선의 본향이라고 한다.

전주이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에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며, 태조 이성계는 시조 이한의 21대 손이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그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다. 태조 집안은 목조 이안사 때 전주를 떠나 동북면으로 이주하였으며,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영흥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조선 건국 후 전주는 영흥ㆍ함흥과 함께 새 왕조의 풍패지향(豐沛之鄕)이 되었다. 풍패란 건국자의 고향을 말한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원년(1392) 8월에 전주목全州牧을 완산부完山府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10년(1410)에 건국자 태조의 어진御眞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경기전이 바로 태조 어진을 봉안한 진전眞殿이다. 이처럼 조선은 건국과 함께 전주를 새 왕조가 일어난 풍패지향으로서 각별하게 예우했다.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은 곧 왕의 존재를 상징하며, 조선왕조의 국조國祖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특히 중시되어 태조와 인연이 깊은 전국 각지의 주요 지역에 태조진전眞殿을 설립하여 이를 모셨다.

 조선왕조의 본향, 전주에 세워진 경기전慶基殿은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태조진전으로서 전통문화의 도시, 전주를 대표하는 사적史蹟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신과 문화를 상징하는 문화재이다. 이익주, 「이성계와 전주」(왕의 초상-경기전과 태조 이성계, 국립전주박물관, 2005)
 

 여기에 봉안된 태조어진(보물 931호)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어진 중에서 화재와 전란을 피하여 온전하게 보존된 작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린 전신상全身像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1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성계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태조 이성계의 본향本鄕이 전주임을 첫 번째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첫 번째 대목을 ‘이성계는 전주의 대성이다’고 기록한 이유는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가문이 조선 땅에 뿌리 깊게 대대손손 내려온 집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영조, 전주를‘풍패지향’으로 만들다

1771년(영조 47년)에 전주 경기전 뒤편에 조경묘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실의 시조인 사공공 이한의 사당이 건립됐다. 조상에 대한 추모와 공경을 강조하는 유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조묘의 건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시기 사회적 추세에 따라 시조에 대한 관심은 종실과 전주이씨 내에서도 확산되었으며, 전주 건지산에 시조 묘역을 조성하려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이욱, 「조선시대 왕실의 시조와 조경묘의 건립」(조선시대사학보 38, 2006)


조선 초기 풍패지향은 전주와 전라도, 영흥ㆍ함흥이 속한 함길도를 풍패라고 칭하였다.

조선 후기 시조 중심의 씨족 의식이 강화되면서 조선왕조 입장에서도 시조에 대한 묘와 이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게 됐다. 사대부들이 이에 대한 필요성을 계속해서 상소했고, 마침에 영조가 이를 수락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영조대에 조경묘가 건립되어 왕업의 기원이 시조 까지 올라가면서, 전주는 관념적인 고향을 넘어서 실제적인 왕실의 고향으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왕실의 시조 이한이 살았던 전주는 조경묘가 건립되면서 태조의 태생지가 아닌 한계를 극복하고 명실공이 조선왕실의 풍패지향으로서 의미와 위상을 확고히 구축했다. 영조때 조경묘 건립의 전주 지역사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동희, 「풍패지향 전주,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그 역사와 성격」(전주학연구 4, 2010)

영조는 “왕실의 시조 묘 건립을 반대한다면 신료가 아니다”고 하면서 “이제 내 나이 80에 이를 건립하지 않는다면 언제 하겠느냐”면서 조경묘 건립을 명령했다. 다만 건지산 시조 묘역 조성은 근거가 분명치 않아 시조사당 건립을 추진해 간 것이다.

영조는 다음과 같이 조경묘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전주에 경기전이 있고 함흥에 준원전이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시조도 묘를 세웠는데 하물며 우리 시조의 묘를 세우지 않겠느냐? 보략(족보)을 살펴보니 부인의 성씨도 적혀있고, 그 선조 또한 기록되어 있다. 모름지기 조선 사대부들이 그 시조를 살피는 것에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하물려 국조國朝의 시조이겠는가?”

조경묘의 규모와 관리 운영은 삼국 시조묘에 의거하여 건립하고, 제물과 묘관은 경기전 의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했다. 조선왕실의 시조 이한은 삼국의 시조처럼 왕이 아님에도 조선 창업 군주 태조를 모신 경기전에 준하도록 명한 것이다. 이는 시조의 위상을 건국자 격으로 높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3. 풍패의 위상 높힌 대한제국

영ㆍ정조대를 거쳐 전주에 대한 조정의 풍패 인식이 한 단계 더 높아진 것은 대한제국기이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전주를 황실의 뿌리로 성역화하여, 1899년 전주 건지산에 시조 이한의 묘역 조경단肇慶壇을 조성했다.
 
1900년에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고 귀경길에 전주에 들러 일가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던 오목대와,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자만동 자락 이목대에 이를 기념하는 비를 고종이 친필로 써서 건립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때 완산에 전주가 왕실의 근원지임을 의미하는 완산비도 건립하였다. 대한제국 선포후 황실의 뿌리를 성역화하여 황제권을 공고히 하려 한 것이다.

풍남문
전주객사 ‘풍패지관’

조선 왕실 시조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시조 이한이 살았던 전주의 풍패로서 위상 또한 높아지고 공고해졌다. 영조대 조경묘 창건과 수덕樹德의 논리로 조선창업이 시조 이한에서부터 싹튼 것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전주는 이제 조선 왕실의 아득한 고향이 아니라 조선 창업이 시작된 실제적 고향으로 인식되고 예우 되었다.
전주가 명실공히 조선왕조가 일어난 근본지지根本之地로 확고히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동희, 「조선후기 전주에 대한 풍패 인식과 조경묘 창건」(전북사학 63호, 2021)


4. 전통문화도시 전주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꾸밈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 도시 전체가 한국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한국의 축소판’이라 이름 붙여도 무색하지 않은 고장이 바로 전주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세계인들이 전주를 찾아오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문화의 본향이 바로 전주다. 대표적으로 한옥・한지・한복 등이 전주에서 시작되었고,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한옥마을을 보존하고 있으며, 고운 문양과 색감의 한복이 멋진 일상복으로 거리를 장악하고 있다. 기와를 얹은 지붕이 하늘을 받치고, 낮은 담장 너머로 슬며시 보이는 풍경들이 예스럽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전주한지는 세계적인 기록물들을 복원하며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악계 최고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도 200년이 넘게 우리 소리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전통 주거 양식인 한옥, 오랜 역사와 전통이 담긴 전주한지, 민족의 정서를 담은 판소리가 모인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는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전통문화도시이다. 전주시 관광거점도시 기본계획, 전주시, 2019
추천0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사소개 | 개인정보처리방침 | 서비스이용약관| 고객센터 | 모바일버젼

이성계리더십센터 | 주소: 전주시 덕진구 매봉15길 8, 3층
연락처 : 010-9501-5123 | jungcell@daum.net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정세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