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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을 보듬어 안은 ‘위봉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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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계센터 작성일 25-05-23 10:38 조회 50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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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왕실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어진과 조경묘에 위치한 전주이씨 시조 위패를 전란에서 안전하기 모실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1675년 전주부윤 권대재에게 위봉산성을 쌓게 한다.

산을 따라 약 8km의 산성이 쌓아지고, 성안에는 행궁이 지어진다. 실제로 동학농민군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왕실은 태조 어진과 시조 위패를 서둘러 이 행궁으로 옮기게 된다.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통해 새나라를 건국했다면, 그와 절친이었던 완주 출신 만육 최양은 두문불출의 길을 걷게 된다. 동문수학하며 그의 총명함을 높이 샀던 이성계는 새로운 조정에 출사를 권했지만, 만육은 끝내 거절하며 고향에 은둔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소양면에는 왕정리, 신왕리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가 그의 아들 방원에게 이곳을 찾아 만육선생을 설득해 조선에 출사를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만육은 이성계의 청을 거절했다. 이러한 일화로 마을 이름이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태조암

완주 위봉산성 부근에 위치한 태조암(太祖庵)에도 이성계와 얽힌 일화가 전해진다. 이곳에서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태조암이다.

태조암은 위봉산성 입구에서부터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되실봉(524m) 아래 전주시내를 굽어보며 자리잡고 있다. 태조암은 숙종 원년인 1675년에 전주부윤(全州府尹) 권대재에 의해 건립됐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전란에 대비해 태조 이성계 어진을 모실 곳이 필요했다. 위봉산성 안에 있는 행궁은 전주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경묘의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피신시키기 위해 쌓았다. 이때 태조 영정을 모신 것을 봉축하기 위해 산성 밖에 태조암을 건립했다고 한다.

실제 동학 농민혁명(1894년)이 일어나 전주부성이 농민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 어진과 위패를 태조암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현재는 위봉사의 산내암자로 위봉사의 말사다.

위봉산성

완주 위봉산(524m)을 둘러싸고 있는 위봉산성은 변란이 있을 경우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사고에 보관한 조선왕조실록을 옮겨놓기 위해 쌓았다.

숙종 원년(1675년)부터 7년간 군민들을 동원해 쌓았다. 성벽 둘레는 약 8,539m, 성벽 높이는 1.8~2.6m, 성 안 면적은 1백66만여㎡에 이른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 등이 확인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산악인들에게 호남알프스로 잘 알려져 있다. 송광사 종남산에서부터 서방산, 위봉산, 원등산, 연석산, 운장산, 구봉산 등 45km에 이르는 산악종주코스이다.

만육 최양 선생

태조 이성계가 극찬한 고려의 충신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만육 최양(晩六 崔瀁 先生)이다. 태조는 “한나라 광무제에게 엄광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최양은 그와 같은 친구다”고 말했다고 한다.
엄광은 광무제 유수(劉秀)의 절친한 친구로 유수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를 도왔다. 그러나 유수가 황제에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에 은거했다. 훗날 광무제가 백방으로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태조가 1395년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출사(出仕)할 것을 요구했지만 최양은 이에 응하지 않고 지금의 소양면 부근에서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최양(1351~1424)은 전주 최씨로 호는 만육이며 정몽주의 생질이다. 고향은 완주군 소양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몽주는 “최양이 나이가 비록 나보다 뒤지지만 도(道)가 나보다 앞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고려 말 우왕 2년(137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던 대학자이다.

최양은 1380년 이성계가 황산대첩에 출정할 때 정몽주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여했다. 1391년 외삼촌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진안군 팔공산에 들어가 3년을 은거했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 한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기려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에 최양선생유허비(전라북도 기념물)가 서 있다.

만육 최양 선생 돈적소(遯蹟所)는 팔공산에 있다. 돈적소는 최양 선생이 ‘돼지처럼 살았던 굴’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만육이 3년간 돈적소에서 은둔했는데 나라에서는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돈적소는 팔공산(八公山, 1,151m) 부근에 있는 자연암굴이다. 암굴 입구는 2.5m정도이고 석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좁아지며 깊이는 10여m, 2층 구조로 된 수직굴 형태로 서로 이어져 있다.

최양은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을 염려했던 애민사상가였다. 그는 우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통해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하려는 권문세족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노비가 비록 천하지만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인데, 으레 재물로 여겨 우마와 교환하면서 소와 말을 사람의 생명보다도 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노비매매를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최양의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사상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완주군 소양면에도 최양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소양면 화심마을에서 동상면 쪽으로 가다보면 대승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만육공이 은거했던 곳이다.

그는 태조가 사신을 보내 공전을 하사했으나 거절했다. 세종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3일 동안 정무(政務)를 정지하고 고기 없는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소양면을 지나다 보면 신왕리(新王里), 왕정리(王停里)라는 마을이 보이는데, 이 마을들이 이와 관련된 지명이다. 새 왕의 사신이 온 곳이라고 하여 신왕리라고 하였으며 왕의 사신이 머문 곳이라고 하여 왕정리라고 하였다. ‘최고집’이라는 말도 바로 만육공의 절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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