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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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계센터 작성일 25-06-30 13:23 조회 454 댓글 0본문
남원 운봉면 황산 아래에 위치한 황산대첩비는 선조 10년(1577년) 운봉 현감 박광옥에 의해 건립됐다. 1380년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해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일본인에 의해 폭파됐다.
황산대첩비는 해방 이후 1957년 현 위치에 다시 건립됐고 폭파된 비석은 파비각(破碑閣) 안에 보호돼 있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됐다.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있다.
황산대첩비문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동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김귀영이 왕명을 받들어 짓다.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이 왕명을 받들어 쓰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남응운이 왕명을 받들어 두전을 쓰다.
만력 3년(선조8, 1575년)에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보고하기를 “운봉현의 동쪽 16리 되는 곳에 황산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곳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 땅 이름도 엉뚱하게 바뀌고 길도 잘 알 수 없어 정확한 지점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수천 수백 년 후에 높은 산은 밋밋해지고 낮은 곳은 잠기게 되어 갈수록 더 희미해지면 아무도 그 장소를 모르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원컨대 큰 돌 하나를 세워 이를 표시하자고 고을의 늙은이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청에 하소연하니,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감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삼가 아룁니다.”고 하였다. 왕께서 그 건의를 받아들여 그 도에서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고 신 귀영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셨다.
신이 명을 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니, 고려말에 나라는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섬 오랑캐들이 그 틈을 타서 성읍을 도륙내고 불지르니 죽은 시체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곳마다 유혈이 낭자하여 모든 산천이 쓸쓸하였다. 함양 사람을 모두 죽이고 운봉을 불지르고 인월에 주둔해 있으면서 말을 배불리 먹여 북쪽으로 진격한다고 떠드니 나라 안팎이 크게 놀라 두려워 하였다.
태조께서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으로 내달려 정봉에 올라가서 형편을 살펴보고는 날랜 군사들을 앞뒤로 호응하여 적을 공격하니 10배가 넘는 적을 모두 무찔렀다.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 모두 소탕하였던 것이다. 그후 200여 년간 바다에 아무런 근심이 없고 영남과 호남 지방이 편안한 것은 모두 이때의 전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남쪽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우러러 추도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고, 받들어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 우리 성조의 크고도 높은 공열은 나라의 역사에 밝게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에 두루 미쳐서 천지에 가득 차고, 고금에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이 산처럼 영원할 것이니 굳이 이러한 사정을 돌에 새겨 형용하지 않더라도 후세에 영원토록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쪽의 산들 가운데 높고도 높이 우뚝 솟은 것이 무려 수백에 이르는데, 우리 성조의 커다란 공훈은 이 봉우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가히 하늘이 만든 높은 산과 그 아름다움을 짝할만 하다 하겠으며, 그 높고 험준한 산세는 영원토록 우러러보는 바가 될 것이다.
아아, 옛날에 주나라의 선왕이 기양으로 사냥갔을 때에 따르는 수레와 군사들의 무리를 간소하게 하였으나 석고石敲에 그 공적을 새겼으며, 회서 지방을 평정하여 변경을 안정시키니 여러 신하들이 황제가 울타리를 깨끗이 한 공적을 기록할 것을 청하므로 그 크고도 훌륭한 공적이 영원토록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하니 좋은 돌에 글자를 새겨 거북과 용으로 장식한 비각에 안치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고 조아리게 한다면 세상이 바뀌어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신 귀영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칭송의 노래를 지어 바친다.
고려의 운명이 다하여 간악하고 사특한 무리들로 인해 안에서부터 무너지자 바깥의 적을 불러들인 꼴이 되어 온 나라가 어육魚肉같은 신세가 되어버리니 만백성의 뼈가 들판에 늘어져 있어 그 참상이 천리나 이어졌네. 그 어지러움을 바로 잡으려 우리 태조께서 장군의 도끼를 받으시고 군대의 규율을 세우시니 그 위세가 천둥처럼 떨쳤네. 정성이 하늘에 도달하여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니 승전할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이니 이는 하늘도 함께 그들을 미워한 것이네. 땅도 그 이로움을 빌려주니 황산의 이로움은 바로 땅의 신이 주신 것이라. 이에 한 번 크게 노하여 그 무위를 크게 떨쳤네. 우리 대장기 흔들리고 북소리 울리자 흉악한 무리들은 어린 새 새끼처럼 버둥거리며 호랑이에게 반항해보려 하였지만 그저 스스로의 목숨만 갖다 바칠 뿐. 활을 쏘아 정수리를 맞히자 투구가 잠시 옆으로 기울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화살이 꿰뚫자 적들은 벌떼처럼 흩어지고 개미처럼 뒤엉켰네. 넋을 잃고 울부짖는 적의 병사들, 일만 마리 소가 골짜기에 가득 찬 듯하니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산등성이에 올라 사방으로 공격해 들어가네. 누가 감히 맞설 수 있으리오. 우뢰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부딪히며 대나무처럼 쪼개지고 기와처럼 부서져서 살과 뇌가 낭자하게 흩어지네. 사람과 하늘이 힘을 합쳐 토벌하니 하루 아침에 소탕하였네. 삼한 땅을 새로이 만드시니 면모를 일신하고 지난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네. 그 업적이 바다까지 이어져 200여 년간을 편안히 지내니 남쪽 백성들 밭 갈고 우물 파서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부모 자식 모시고 길렀다네. 그 당시 업적의 결과이니, 이에 추모하고 이에 축원하며 가슴과 뱃속에 새겨두니 세월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 명나라 말력 5년에 돌을 캐어 기록하고 산 기슭에 세우니 기울어지거나 벗겨짐이 없이 영원토록 변치 않음이 이 돌과 같다네.
만력 5년 정축(선조10, 1577년) 8월 일에 조봉대부 행 운봉현감 남원진관 병마절제도위부 겸 춘추관기사관 신 박광옥이 세우다.
황산대첩비는 해방 이후 1957년 현 위치에 다시 건립됐고 폭파된 비석은 파비각(破碑閣) 안에 보호돼 있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됐다.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있다.
황산대첩비문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동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김귀영이 왕명을 받들어 짓다.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이 왕명을 받들어 쓰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남응운이 왕명을 받들어 두전을 쓰다.
만력 3년(선조8, 1575년)에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보고하기를 “운봉현의 동쪽 16리 되는 곳에 황산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곳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 땅 이름도 엉뚱하게 바뀌고 길도 잘 알 수 없어 정확한 지점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수천 수백 년 후에 높은 산은 밋밋해지고 낮은 곳은 잠기게 되어 갈수록 더 희미해지면 아무도 그 장소를 모르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원컨대 큰 돌 하나를 세워 이를 표시하자고 고을의 늙은이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청에 하소연하니,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감히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삼가 아룁니다.”고 하였다. 왕께서 그 건의를 받아들여 그 도에서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고 신 귀영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셨다.
신이 명을 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니, 고려말에 나라는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섬 오랑캐들이 그 틈을 타서 성읍을 도륙내고 불지르니 죽은 시체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곳마다 유혈이 낭자하여 모든 산천이 쓸쓸하였다. 함양 사람을 모두 죽이고 운봉을 불지르고 인월에 주둔해 있으면서 말을 배불리 먹여 북쪽으로 진격한다고 떠드니 나라 안팎이 크게 놀라 두려워 하였다.
태조께서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으로 내달려 정봉에 올라가서 형편을 살펴보고는 날랜 군사들을 앞뒤로 호응하여 적을 공격하니 10배가 넘는 적을 모두 무찔렀다.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 모두 소탕하였던 것이다. 그후 200여 년간 바다에 아무런 근심이 없고 영남과 호남 지방이 편안한 것은 모두 이때의 전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남쪽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우러러 추도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고, 받들어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 우리 성조의 크고도 높은 공열은 나라의 역사에 밝게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에 두루 미쳐서 천지에 가득 차고, 고금에 밝게 빛나는 것이 마치 이 산처럼 영원할 것이니 굳이 이러한 사정을 돌에 새겨 형용하지 않더라도 후세에 영원토록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쪽의 산들 가운데 높고도 높이 우뚝 솟은 것이 무려 수백에 이르는데, 우리 성조의 커다란 공훈은 이 봉우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가히 하늘이 만든 높은 산과 그 아름다움을 짝할만 하다 하겠으며, 그 높고 험준한 산세는 영원토록 우러러보는 바가 될 것이다.
아아, 옛날에 주나라의 선왕이 기양으로 사냥갔을 때에 따르는 수레와 군사들의 무리를 간소하게 하였으나 석고石敲에 그 공적을 새겼으며, 회서 지방을 평정하여 변경을 안정시키니 여러 신하들이 황제가 울타리를 깨끗이 한 공적을 기록할 것을 청하므로 그 크고도 훌륭한 공적이 영원토록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하니 좋은 돌에 글자를 새겨 거북과 용으로 장식한 비각에 안치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보고 조아리게 한다면 세상이 바뀌어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신 귀영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칭송의 노래를 지어 바친다.
고려의 운명이 다하여 간악하고 사특한 무리들로 인해 안에서부터 무너지자 바깥의 적을 불러들인 꼴이 되어 온 나라가 어육魚肉같은 신세가 되어버리니 만백성의 뼈가 들판에 늘어져 있어 그 참상이 천리나 이어졌네. 그 어지러움을 바로 잡으려 우리 태조께서 장군의 도끼를 받으시고 군대의 규율을 세우시니 그 위세가 천둥처럼 떨쳤네. 정성이 하늘에 도달하여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니 승전할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이니 이는 하늘도 함께 그들을 미워한 것이네. 땅도 그 이로움을 빌려주니 황산의 이로움은 바로 땅의 신이 주신 것이라. 이에 한 번 크게 노하여 그 무위를 크게 떨쳤네. 우리 대장기 흔들리고 북소리 울리자 흉악한 무리들은 어린 새 새끼처럼 버둥거리며 호랑이에게 반항해보려 하였지만 그저 스스로의 목숨만 갖다 바칠 뿐. 활을 쏘아 정수리를 맞히자 투구가 잠시 옆으로 기울었는데, 이미 날카로운 화살이 꿰뚫자 적들은 벌떼처럼 흩어지고 개미처럼 뒤엉켰네. 넋을 잃고 울부짖는 적의 병사들, 일만 마리 소가 골짜기에 가득 찬 듯하니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산등성이에 올라 사방으로 공격해 들어가네. 누가 감히 맞설 수 있으리오. 우뢰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부딪히며 대나무처럼 쪼개지고 기와처럼 부서져서 살과 뇌가 낭자하게 흩어지네. 사람과 하늘이 힘을 합쳐 토벌하니 하루 아침에 소탕하였네. 삼한 땅을 새로이 만드시니 면모를 일신하고 지난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네. 그 업적이 바다까지 이어져 200여 년간을 편안히 지내니 남쪽 백성들 밭 갈고 우물 파서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부모 자식 모시고 길렀다네. 그 당시 업적의 결과이니, 이에 추모하고 이에 축원하며 가슴과 뱃속에 새겨두니 세월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 명나라 말력 5년에 돌을 캐어 기록하고 산 기슭에 세우니 기울어지거나 벗겨짐이 없이 영원토록 변치 않음이 이 돌과 같다네.
만력 5년 정축(선조10, 1577년) 8월 일에 조봉대부 행 운봉현감 남원진관 병마절제도위부 겸 춘추관기사관 신 박광옥이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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