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 오목대에서 '대풍가'를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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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목대에서 ‘대풍가’를 부르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가 이곳을 다녀갔다.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 본향인 전주에 들러 종친들과 전승 축하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호기롭게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는데,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센 바람이 부니 구름이 높날리네. <大風起兮雲飛揚>
위세를 세상에 널리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어떻게 훌륭한 군사들을 얻어 나라를 지킬까. <安得猛士兮守四方>
고려 말엽 1380년,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져 백성들이 불안에 떨자 우왕은 이성계를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아우르는 삼도순찰사로 임명하고 남원으로 내려가 왜구를 소탕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북쪽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국민적 영웅이 된 이성계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원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말 1,600필을 획득하는 황산대첩을 거두게 된다. 이후 왜구들의 조선 침략이 잠잠해진다.
남원에서 펼쳐진 황산대첩은 오늘날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용비어천가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첫 번째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끊은 다음 두 번째 화살로 이마 부위를 맞혀 투구를 벗기자 그의 부하 이지란이 화살을 날려 사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왜구를 전멸시키고 승리감을 만끽한 이성계는 개성으로 가는 도중 전주에 있는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며 발밑에 펼쳐진 전주 시내를 바라보며 호탕한 모습으로 그 유명한 대풍가를 부른다.
이성계가 창업을 꿈꾸며 그 호기를 나타내기 위해 대풍가를 불렀다면 유방은 창업 공신들을 스스로 죽인 후 나라를 어떻게 지킬까 걱정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이성계는 자신의 본향(本鄕)에서 창업 선배인 유방을 생각하며 새 나라 창업의 멘토로 삼았음은 분명한 것 같다.
북방에서 거란족과 여진족을 무찌르며 승승장구하던 이성계. 북방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남원 황산전투의 승리를 통해 명실상부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무능한 정권에 실망했던 백성들은 외적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하던 이성계 장군의 ‘목자득국’(木子得國,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고려의 실력자로 떠오른 이성계는 도탄에 빠진 고려 백성들로부터 새로운 지도자로 추앙받았는데, 금의환향의 심정으로 오목대에 올랐을 때 전주 이씨 종친들에게서도 새로운 나라의 개국을 권고받았을 것이다.
이때가 조선 건국 12년 전의 일이다. 600여 년 전 오목대에 오른 이성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의 어깨 위에 놓여진 시대정신에 대해 그는 어떤사명감을 가지게 됐을까. 오목대에서 그가 품었던 꿈과 비전은 새 나라 창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목대 누각 옆에는 1900년대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각이 있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께서 말을 멈추고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이다. 왜 고종은 이런 비각을 세웠을까. 아마도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바로 세워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태조 이성계의 기개를 그리워한 것은 아닐까.
전주의 오목대는 조선의 역대 왕들에게는 기개를 아로 새겨주는 일종의 모태였던 셈이다. ‘자만금표’(滋滿禁標)라는 표석이 있다. 왕조가 살았던 곳이므로 아무나 이곳에 출입 할 수 없다는 표시다. 왕가를 일으킨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겠다’는 꿈을 품은 이성계에게는 이것을 실현할 새로운 세력과 혁신적인 정치철학이 필요했다. 이성계가 꿈꾸는 나라의 설계서가 된 것이 바로 ‘성리학’이었고 그 정치철학으로 무장된 신진사대부가 정치기반이 돼 주었다.
2. 위화도결단을 통해 ‘이밥사상’을 실현하다
고려를 수호할 것인가, 아니면 혁신적인 새 나라를 창업할 것인가. 이성계에게 이 문제는 삶을 관통하는 화두(話頭)였다.
당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꾼다는 것은 맹자의 방벌론(放伐論)처럼 감히 누구도 엄두조차 못할 생각이었다.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성계의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는 서서히 고려사회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점점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성계가 가졌던 혁신적 사고의 키워드는 바로 ‘창업, 성리학, 토지개혁(과전법)’이다. 이 모두가 과거 고려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혁신적 사고인 셈이다. 요즘 용어로는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남원 황산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조상의 고향인 전주 오목대를 찾아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며 마음 한구석에 ‘창업’의 꿈을 분출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정도전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에 들어간다. 그 설계서에는 ‘모든 백성들이 쌀밥을 먹는 민생정치(이밥사상)’가 담겨 있고, 조준을 통해 과전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혁신적 정책이다.
인생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물며 역사의 순간에 다가오는 기회란 더 말할 나위 없다. 역사의 주사위는 그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군 대장으로서 국경을 넘어 명나라와 한판 승부를 겨룰 것인지, 말머리를 돌려 하늘 아래 최고 지선의 자리를 넘볼 것인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이성계는 모래성을 쌓는 것 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선택지를 결정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던 것은 이미 판세가 이성계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왕의 곁에 최영 장군이 있었지만 민심은 이성계 장군으로 모이고 있었다.
위화도결단을 단행한 이성계는 일인자 자리를 두고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위화도 회군의 파트너였던 조민수를 실각시키고 나서 이성계와 창업 지지파들은 빠르고 치밀하게 그들의 과업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고려는 500년을 지탱해 온 나라였다. 아무리 부패하고 무능했다 하지만 쉽게 열쇠를 넘겨주지는 않았다. 고려 왕권파와 이성계 세력간에는 무려 4년여 간의 권력투쟁이 진행됐다.
마침내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이 추대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이로써 조선은 창업의 새 역사를 맞이하고 고려는 34왕 475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역성혁명파들의 정책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이었는지 태조 즉위 11일 만에 관제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모든 준비 끝에 창업이 성사된 것이다.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가 이곳을 다녀갔다.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 본향인 전주에 들러 종친들과 전승 축하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호기롭게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는데,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센 바람이 부니 구름이 높날리네. <大風起兮雲飛揚>
위세를 세상에 널리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어떻게 훌륭한 군사들을 얻어 나라를 지킬까. <安得猛士兮守四方>
고려 말엽 1380년,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져 백성들이 불안에 떨자 우왕은 이성계를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아우르는 삼도순찰사로 임명하고 남원으로 내려가 왜구를 소탕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북쪽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국민적 영웅이 된 이성계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원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말 1,600필을 획득하는 황산대첩을 거두게 된다. 이후 왜구들의 조선 침략이 잠잠해진다.
남원에서 펼쳐진 황산대첩은 오늘날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용비어천가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첫 번째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끊은 다음 두 번째 화살로 이마 부위를 맞혀 투구를 벗기자 그의 부하 이지란이 화살을 날려 사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왜구를 전멸시키고 승리감을 만끽한 이성계는 개성으로 가는 도중 전주에 있는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며 발밑에 펼쳐진 전주 시내를 바라보며 호탕한 모습으로 그 유명한 대풍가를 부른다.
이성계가 창업을 꿈꾸며 그 호기를 나타내기 위해 대풍가를 불렀다면 유방은 창업 공신들을 스스로 죽인 후 나라를 어떻게 지킬까 걱정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이성계는 자신의 본향(本鄕)에서 창업 선배인 유방을 생각하며 새 나라 창업의 멘토로 삼았음은 분명한 것 같다.
북방에서 거란족과 여진족을 무찌르며 승승장구하던 이성계. 북방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남원 황산전투의 승리를 통해 명실상부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무능한 정권에 실망했던 백성들은 외적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하던 이성계 장군의 ‘목자득국’(木子得國,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고려의 실력자로 떠오른 이성계는 도탄에 빠진 고려 백성들로부터 새로운 지도자로 추앙받았는데, 금의환향의 심정으로 오목대에 올랐을 때 전주 이씨 종친들에게서도 새로운 나라의 개국을 권고받았을 것이다.
이때가 조선 건국 12년 전의 일이다. 600여 년 전 오목대에 오른 이성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의 어깨 위에 놓여진 시대정신에 대해 그는 어떤사명감을 가지게 됐을까. 오목대에서 그가 품었던 꿈과 비전은 새 나라 창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목대 누각 옆에는 1900년대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각이 있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께서 말을 멈추고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이다. 왜 고종은 이런 비각을 세웠을까. 아마도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바로 세워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태조 이성계의 기개를 그리워한 것은 아닐까.
전주의 오목대는 조선의 역대 왕들에게는 기개를 아로 새겨주는 일종의 모태였던 셈이다. ‘자만금표’(滋滿禁標)라는 표석이 있다. 왕조가 살았던 곳이므로 아무나 이곳에 출입 할 수 없다는 표시다. 왕가를 일으킨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겠다’는 꿈을 품은 이성계에게는 이것을 실현할 새로운 세력과 혁신적인 정치철학이 필요했다. 이성계가 꿈꾸는 나라의 설계서가 된 것이 바로 ‘성리학’이었고 그 정치철학으로 무장된 신진사대부가 정치기반이 돼 주었다.
2. 위화도결단을 통해 ‘이밥사상’을 실현하다
고려를 수호할 것인가, 아니면 혁신적인 새 나라를 창업할 것인가. 이성계에게 이 문제는 삶을 관통하는 화두(話頭)였다.
당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꾼다는 것은 맹자의 방벌론(放伐論)처럼 감히 누구도 엄두조차 못할 생각이었다.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성계의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는 서서히 고려사회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점점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성계가 가졌던 혁신적 사고의 키워드는 바로 ‘창업, 성리학, 토지개혁(과전법)’이다. 이 모두가 과거 고려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혁신적 사고인 셈이다. 요즘 용어로는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남원 황산에서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조상의 고향인 전주 오목대를 찾아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며 마음 한구석에 ‘창업’의 꿈을 분출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정도전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에 들어간다. 그 설계서에는 ‘모든 백성들이 쌀밥을 먹는 민생정치(이밥사상)’가 담겨 있고, 조준을 통해 과전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혁신적 정책이다.
인생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물며 역사의 순간에 다가오는 기회란 더 말할 나위 없다. 역사의 주사위는 그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군 대장으로서 국경을 넘어 명나라와 한판 승부를 겨룰 것인지, 말머리를 돌려 하늘 아래 최고 지선의 자리를 넘볼 것인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이성계는 모래성을 쌓는 것 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선택지를 결정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던 것은 이미 판세가 이성계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왕의 곁에 최영 장군이 있었지만 민심은 이성계 장군으로 모이고 있었다.
위화도결단을 단행한 이성계는 일인자 자리를 두고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위화도 회군의 파트너였던 조민수를 실각시키고 나서 이성계와 창업 지지파들은 빠르고 치밀하게 그들의 과업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고려는 500년을 지탱해 온 나라였다. 아무리 부패하고 무능했다 하지만 쉽게 열쇠를 넘겨주지는 않았다. 고려 왕권파와 이성계 세력간에는 무려 4년여 간의 권력투쟁이 진행됐다.
마침내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이 추대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이로써 조선은 창업의 새 역사를 맞이하고 고려는 34왕 475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역성혁명파들의 정책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이었는지 태조 즉위 11일 만에 관제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모든 준비 끝에 창업이 성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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