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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동안 한번도 패한적 없는 이성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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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계센터
댓글 0건 조회 1,000회 작성일 24-09-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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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년동안 한번도 패한적 없는 전쟁영웅

태조 이성계는 전쟁에 나선 이후 30여 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장수이다. 격변하는 14세기 동북아시아의 최고의 ‘전쟁영웅’이 됐다. 이렇듯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돌파(突破)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나를 따르라’는 솔선수범의 자세를 바탕으로 자신의 친위부대인 가별초(家別抄)와 함께 자신감 있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나아갔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가별초는 1천에서 2천명 규모의 사병집단을 거느렸다. 이틀 길을 하루에 달리고 10배나 많은 적군을 밀어붙이는 강병들이었다. 또한 그에겐 여진족 기병부대도 있었는데 이 부대는 야전에서 정면대결을 펼쳤고 때로는 적군을 습격했다.

이성계는 조선 창업 군주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는 고려말 최고의 무장이었다. 1361년 독로강만호 박의(朴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으며 같은해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수도 개경을 점령한 홍건적을 격퇴했다.

이때 이성계의 나이가 26살이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1315~1361)이 사망한 후 그의 가별초 부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1362년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온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의 침입을 막아냈으며, 1370년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기도 했다.

제1차 요동정벌에서 고구려의 첫 수도인 오녀산성을 점령하며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후 수차례 왜구 침입을 막아냈으며 1380년 지리산 일대 황산에서 대규모 왜구를 섬멸했다.

황산대첩에서는 “겁이 나는 자는 물러거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며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이는 모든 전투에서 선봉에서 서서 지휘하는 이성계의 특징이다.

이 황산 전투로 고려 말 왜구 침입은 잦아들게 되었으며, 이성계는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1383년 대규모 기병을 이끌고 침입한 여진족 호바투(胡拔都)를 막아내기도 했다. 이성계는 내부 반란 진압은 물론 홍건적, 몽골, 왜구, 여진 등 동아시아 거의 모든 세력과 싸워 승리했다.


2. 황산대첩에서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다

황산대첩은 이성계의 ‘돌파의 리더십’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본인이 앞장서서 군사들을 이끌고 있다. “내가 먼저 적군에게 죽겠다”는 사즉생(死則생生)의 자세로 왜구를 향해 진격했다. 장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군사들의 사기는 충전하게 된다.

황산(荒山)은 남원시 운봉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해발 695m의 바위산이다.

1380년(우왕 6)에 삼도순찰사 이성계는 이 산에서 배극렴, 이지란 등과 함께 진포(군산)에서
패한 후 남원지역에 결집해 있던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가 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찌기 없었다.” <태조실록 총서>

1380년 우왕 8년, 왜구는 500척을 배를 이끌고 한반도 삼남지방을 침입했다. 이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규모였다. 말이 왜구지 잘 정비된 군사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왜구는 파죽지세로 한반도의 내륙지방으로 파고들어 왔다. 상주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경산부를 지났다. 이들은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관아를 습격했다. 그들은 함양성을 도륙하고, 남원과 광주를 습격한 후 한양을 치겠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고려 정부는 배극렴 등 9명의 원수를 파병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박수경, 배언 2명의 원수와 함께 5백명의 군졸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등등한 왜구는 함양성을 함락하고 남원으로 향하여 주변 마을을 약탈하고 장차 북쪽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고려조정에서는 과거 홍건적에 의해 개성이 유린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남원으로 급파한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이성계는 한양에서 남원으로 오는 길에 왜구에게 죽은 고려 백성의 시신이 서로 잇대어 있음을 가엾게 생각하며 편안히 잠도 못자고 밥도 먹지 못했다.


3. 겁이나는 자는 물러거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고려 백성들의 실상을 목격한 이성계는 왜구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바로 이튿날 적과 대적하러 갔다. 본래 배극렴 등 남원에 있던 장수들은 적이 험지에 있으니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이성계는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라며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어 적이 주둔한 인월 근처인 운봉현으로 가서 황산 정산봉에 올라 주변 지세를 살펴보았다.

지형을 살펴본바 적이 아군의 배후를 기습할 것임을 예상하고는 바로 선제공격에 나섰다. 왜구들은 이성계의 선제공격에 밀려 산으로 들어갔다. 산에서의 싸움은 워낙 치열해서 이성계는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을 정도였다.

왜구 장수 아지발도와의 싸움에서 이성계의 돌파 리더십은 정점을 보인다. 황산전투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아지발도를 스스로 진격해 제거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전쟁의 모습을 태조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지발도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아지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했다.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르게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의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태조실록총서>

왜구와 고려군이 서로 대치하면서 멀리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온몸에 철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아지발도'를 잡을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명궁이라 한들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 쓴 장수여서 화살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부장인 이지란과 작전을 세웠다.

‘내가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춰 투구를 떨어트릴 것이니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바로 화살을 쏘아 아지발도의 머리를 쏘라'는 것이었다.
전무후무한 두 사람의 화살 작전은 적중했다. 왜구의 장수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투구가 벗겨지자 곧바로 쏜 이지란의 화살이 아지발도의 머리를 뚫어버린 것이다.
이성계와 이지란이 쏜 단 2발의 화살로 왜장을 처치하자 믿었던 장수를 잃은 왜구는 기세가 꺾여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었고 사기가 충천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며 왜구를 완전히 소탕하게 된 것이다.

『태조실록』 총서에는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겁이 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터이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감동되어 용기백배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太祖誓指天日, 麾左右曰: ‘怯者退, 我且死賊!’ 將士感厲, 勇氣百倍)라고 이성계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다.

말을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고려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 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이성계는 돌파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황산에서 왜구와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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