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하늘의 소리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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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임실 상이암에서 기도를 하면서 하늘로부터 왕조 창업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하늘이라는 높은 곳에서 들었다는 것은 바로 ‘백성의 목소리’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조선을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여론과 민심을 받들어 새 나라를 개국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성계의 모습은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새 나라 개국이라는 큰 그림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는 대신 백성들과 자신의 지지자들을 섬기는 태도를 보인다. 보스가 되기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품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의 개국에서 이성계가 자신의 사익(私益)을 추구했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자신의 지지세력인 성리학자들에게 세부적으로 그리게 한다. 정도전, 조준, 권근 등이 중심이 돼 새 나라의 통치철학과 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의 3대 정치이념은 숭유억불, 농본주의, 왕도정치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보여준 가장 큰 덕은 바로 ‘겸손’함이었다. 본인이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후 곧바로 왕권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4년 동안을 기다리며 백성들의 민심이 자신을 향하기를 인내와 겸손을 가지고 기다렸다.
마침내 수차례의 겸양지덕(謙讓之德)을 보여 주며 고려로부터 왕권을 이양 받게 된다.
이성계는 전장에서도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애틋했다. 이성계는 1380년 삼도순찰사에 임명돼 왜구를 정벌하기 위해 남원으로 향한다.
이성계 군대는 군사 작전 중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황산전투가 끝난 뒤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가벼운 대나무로 바꾸려 하자 이성계는 “대나무가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대나무는 민가에서 심은 것이고 우리가 꾸려온 물건이 아니니 그 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가면 족할 것이다”고 말했다.
당시 고려군은 왜적에 필적할 만큼 백성을 약탈했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위를 일절 금했다. 이것이 바로 이성계 군대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는 늘 자신을 낮추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주변의 인망을 얻었다. 그 결과 싸움터에서는 부하들이 앞 다투어 최전방에 나서게끔 했고 백관들 또한 앞다투어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태조 이성계는 바로 이런 섬김의 리더십과 시대를 읽는 지혜로 창업이라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상이암(上耳庵)
상이암은 임실의 주산(主山)인 해발 876m의 성수산(聖壽山)에 자리잡고 있다. 875년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는 도선암을 창건하였고, 왕건이 이곳에서 100일 기도 후 고려 건국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왕건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환희담(歡喜潭)이라 글을 바위에 새겼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성계도 이곳에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도중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와 손을 귀 위로 올리면서 성수만세(聖壽萬歲)라고 세 번 외치는 용비어천의 길몽을 꾸었다.
그는 하늘로부터 “앞으로 이 산천의 왕이 된다”는 소리를 귀로 들었다. 그래서 암자 이름이 ‘상이암’이 되었다. 삼업(三業)이 청정함을 깨닫아 ‘삼청동(三淸洞)’이라 글씨를 새겼다. 이성계가 쓴 이 비는 현재도 이곳에 남아 있다.
이후 성수산은 조선 제일의 생왕처(生王處)라 불리게 된다. 이곳은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으로 임금이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형국으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충만한 생기처(生氣處)라 한다. 또한 구룡쟁주지지(九龍爭珠之地)로 9마리의 용이 구슬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형국이라 한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받을 때에도 이곳은 유생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태조 이성계가 계시를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상이암은 1894년 동학혁명 때 화재로 소실, 왜병들에 의한 소실 및 6·25 때 소실 등 여러 차례 소실되었었다.
지금 건물은 1958년 11월 상이암 재건위원들이 세웠는데 법당 상량식 당시 오색 서광(瑞光)이 원형을 그리면서 하늘로 높이 뻗는 광경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전북일보)
장군바위
장군바위는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에 있다. 마을 이름이 ‘장군바위마을’이다.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을 이끈 후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유로 마을 이름이 관기(館基)마을로이 되었고, 장군바위로 명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이성계 장군의 발자국과 오줌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전한다.
장군바위마을은 옛부터 한양에서 전주와 남원을 거쳐 순천, 광양, 사천, 진주 등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0년 경까지 20여 가구가 거주했고 길가는 나그네를 위한 주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성수산 기도터와 칼바위
이성계가 1380년 황산대첩을 전후해 이곳에서 100일 동안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학대사의 소개로 이곳에 기도터를 잡은 이성계는 100일이 가까이 왔지만 번뇌만 깊어갈 뿐 마음의 깨달음을 얻지 못해 초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는 성수산 정산 부근에 기도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첩첩산중으로 오직 하늘만 보일 뿐 속세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곳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이 치고 번괘가 하늘을 뒤덥었다.
갑가기 거대한 불기둥이 이성계를 향해 내려왔고,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칼로 불기둥을 내리 쳤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쓰러졌다. 무학대사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자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위가 반쪽으로 잘라져 한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한쪽은 현재의 칼바위가 되었다.
칼로 불기둥을 내리치는 순간, 세상의 번뇌가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세상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이성계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부처가 아닌 것 아닌 세상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삼업(三業)을 깨뜻하게 씻어냈다.
임실에 남아 있는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
임실에는 이성계와 관련됨 마을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성계가 상이암까지 수천리를 걸어왔다고 해서 ‘수천리(마을)’가 있다. 아침에 왔다고 해서 ‘아침재(조치마을)’도 있다. 왕이 다녀갔다고 해서 ‘왕방리’가 생겼다. 대운재, 대왕마을도 있는데 이는 큰 영웅 혹은 대왕이 지나갔다는 유래에서 명칭되었다고 한다.
임실치즈마을은 도인리에 있다. 이는 이성계가 당당하게 길을 끌고 갔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인근에 당당마을이 있다. 또한 임금이 머물고 간 마을이라고 해서 ‘후촌마을’도 있다. 행정구역은 진안이지만, 부근에 구신리라는 마을도 있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충신을 구하려 했다고 해서 지어졌다. 이 지명은 충신 정몽주하고도 연관된다.
이성계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조선을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여론과 민심을 받들어 새 나라를 개국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성계의 모습은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새 나라 개국이라는 큰 그림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는 대신 백성들과 자신의 지지자들을 섬기는 태도를 보인다. 보스가 되기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품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의 개국에서 이성계가 자신의 사익(私益)을 추구했던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자신의 지지세력인 성리학자들에게 세부적으로 그리게 한다. 정도전, 조준, 권근 등이 중심이 돼 새 나라의 통치철학과 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의 3대 정치이념은 숭유억불, 농본주의, 왕도정치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보여준 가장 큰 덕은 바로 ‘겸손’함이었다. 본인이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후 곧바로 왕권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4년 동안을 기다리며 백성들의 민심이 자신을 향하기를 인내와 겸손을 가지고 기다렸다.
마침내 수차례의 겸양지덕(謙讓之德)을 보여 주며 고려로부터 왕권을 이양 받게 된다.
이성계는 전장에서도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애틋했다. 이성계는 1380년 삼도순찰사에 임명돼 왜구를 정벌하기 위해 남원으로 향한다.
이성계 군대는 군사 작전 중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황산전투가 끝난 뒤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가벼운 대나무로 바꾸려 하자 이성계는 “대나무가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대나무는 민가에서 심은 것이고 우리가 꾸려온 물건이 아니니 그 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가면 족할 것이다”고 말했다.
당시 고려군은 왜적에 필적할 만큼 백성을 약탈했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위를 일절 금했다. 이것이 바로 이성계 군대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는 늘 자신을 낮추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주변의 인망을 얻었다. 그 결과 싸움터에서는 부하들이 앞 다투어 최전방에 나서게끔 했고 백관들 또한 앞다투어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태조 이성계는 바로 이런 섬김의 리더십과 시대를 읽는 지혜로 창업이라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상이암(上耳庵)
상이암은 임실의 주산(主山)인 해발 876m의 성수산(聖壽山)에 자리잡고 있다. 875년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는 도선암을 창건하였고, 왕건이 이곳에서 100일 기도 후 고려 건국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왕건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환희담(歡喜潭)이라 글을 바위에 새겼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성계도 이곳에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도중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와 손을 귀 위로 올리면서 성수만세(聖壽萬歲)라고 세 번 외치는 용비어천의 길몽을 꾸었다.
그는 하늘로부터 “앞으로 이 산천의 왕이 된다”는 소리를 귀로 들었다. 그래서 암자 이름이 ‘상이암’이 되었다. 삼업(三業)이 청정함을 깨닫아 ‘삼청동(三淸洞)’이라 글씨를 새겼다. 이성계가 쓴 이 비는 현재도 이곳에 남아 있다.
이후 성수산은 조선 제일의 생왕처(生王處)라 불리게 된다. 이곳은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으로 임금이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형국으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충만한 생기처(生氣處)라 한다. 또한 구룡쟁주지지(九龍爭珠之地)로 9마리의 용이 구슬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형국이라 한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받을 때에도 이곳은 유생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태조 이성계가 계시를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상이암은 1894년 동학혁명 때 화재로 소실, 왜병들에 의한 소실 및 6·25 때 소실 등 여러 차례 소실되었었다.
지금 건물은 1958년 11월 상이암 재건위원들이 세웠는데 법당 상량식 당시 오색 서광(瑞光)이 원형을 그리면서 하늘로 높이 뻗는 광경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전북일보)
장군바위
장군바위는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에 있다. 마을 이름이 ‘장군바위마을’이다.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을 이끈 후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유로 마을 이름이 관기(館基)마을로이 되었고, 장군바위로 명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이성계 장군의 발자국과 오줌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전한다.
장군바위마을은 옛부터 한양에서 전주와 남원을 거쳐 순천, 광양, 사천, 진주 등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0년 경까지 20여 가구가 거주했고 길가는 나그네를 위한 주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성수산 기도터와 칼바위
이성계가 1380년 황산대첩을 전후해 이곳에서 100일 동안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학대사의 소개로 이곳에 기도터를 잡은 이성계는 100일이 가까이 왔지만 번뇌만 깊어갈 뿐 마음의 깨달음을 얻지 못해 초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는 성수산 정산 부근에 기도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첩첩산중으로 오직 하늘만 보일 뿐 속세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곳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이 치고 번괘가 하늘을 뒤덥었다.
갑가기 거대한 불기둥이 이성계를 향해 내려왔고,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칼로 불기둥을 내리 쳤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쓰러졌다. 무학대사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자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위가 반쪽으로 잘라져 한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한쪽은 현재의 칼바위가 되었다.
칼로 불기둥을 내리치는 순간, 세상의 번뇌가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세상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이성계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부처가 아닌 것 아닌 세상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삼업(三業)을 깨뜻하게 씻어냈다.
임실에 남아 있는 이성계와 관련된 지명
임실에는 이성계와 관련됨 마을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성계가 상이암까지 수천리를 걸어왔다고 해서 ‘수천리(마을)’가 있다. 아침에 왔다고 해서 ‘아침재(조치마을)’도 있다. 왕이 다녀갔다고 해서 ‘왕방리’가 생겼다. 대운재, 대왕마을도 있는데 이는 큰 영웅 혹은 대왕이 지나갔다는 유래에서 명칭되었다고 한다.
임실치즈마을은 도인리에 있다. 이는 이성계가 당당하게 길을 끌고 갔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인근에 당당마을이 있다. 또한 임금이 머물고 간 마을이라고 해서 ‘후촌마을’도 있다. 행정구역은 진안이지만, 부근에 구신리라는 마을도 있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충신을 구하려 했다고 해서 지어졌다. 이 지명은 충신 정몽주하고도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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